하나님의 애교인 위로
성경에 나오는 위로라는 개념은 단순히 고통과 낙심 가운데 있는 영혼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헬라어로 3874paraklesis" 파라클레시스 3870에서 유래된 단어로 "애원, 충고, 이로, 위안, 간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3870 parakalew 파라클레오 3844 para(파라)와 2564 kalew(칼레오)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가까이 부르다, 초청하다, 기원하다, (탄원, 충고, 위로에 의해)청하다, 요구하다, 위로하다, 욕망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면 "가까이에서 부른다"는 차원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곁에서 부른다는 뜻도 되지만 내 존재 안에서 부르시는 의미이며 내 존재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시는 것이다. 즉 우리를 초청하는 것이다.
구약의 단어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5162 나함은 "한숨 쉬다, 강하게 숨 쉬다, 뉘우치다, 동정하다, 위로하다, 후회하다, 원수를 갚다, 스스로 안심시키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12선지자 중에 나훔이라는 이름도 이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의 뜻이 "위로의 도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존재를 안심시키는 뜻도 있지만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회개의 차원에서 부르시고, 훈계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상태를 위로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나함의 마지막 문자인 (맴)은 물, 정화, 부흥 사상"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진리를 배워서 따르고 지키고, 능수능란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을 말하고 있다. 중간 문자인 (헤트)는 "생명, 끈, 옥타브, 시공간의 초월"을 뜻하는 단어로 진리를 배워서 얻은 깨달음에 의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첫 단어인 (눈)은 "물고기, 번성, 이해의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진리를 배워서 온전하게 된 사역자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를 분석하게 되면 "진리를 깨달은 우리가 생명을 번성케 하고 부흥케 해야 되는 의무를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시고 다른 존재를 위로하게 하시는 임무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추기시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애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인간은 위로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위로 받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에게 위로 받지 못한다면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고 한다. 심지어 그렇지 못하면 동물이나 식물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자기 근처에 두고 살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그밖에 다른 사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인간의 심연 속에 위로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 얼마나 자기를 발견하고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동식물, 사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더라도 그렇게 위로하는 것이 그러한 종류를 통해서 하나님이 위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상이 없다면 실망하고 낙심하게 된다. 그리고 제한적인 위로에서 끄치고 만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위로하시고자 지금도 애교를 보이시고 있는 데도 ‘바’자 ‘보’자 같은, ‘등’자 ‘신’자 같은 우리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애교를 체험하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지금도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애교이며 관심일수도 있다.
그러면 "가까이에서 부른다"는 차원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곁에서 부른다는 뜻도 되지만 내 존재 안에서 부르시는 의미이며 내 존재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시는 것이다. 즉 우리를 초청하는 것이다.
구약의 단어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5162 나함은 "한숨 쉬다, 강하게 숨 쉬다, 뉘우치다, 동정하다, 위로하다, 후회하다, 원수를 갚다, 스스로 안심시키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12선지자 중에 나훔이라는 이름도 이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가버나움이라는 지명의 뜻이 "위로의 도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존재를 안심시키는 뜻도 있지만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회개의 차원에서 부르시고, 훈계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상태를 위로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나함의 마지막 문자인 (맴)은 물, 정화, 부흥 사상"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진리를 배워서 따르고 지키고, 능수능란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을 말하고 있다. 중간 문자인 (헤트)는 "생명, 끈, 옥타브, 시공간의 초월"을 뜻하는 단어로 진리를 배워서 얻은 깨달음에 의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첫 단어인 (눈)은 "물고기, 번성, 이해의 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진리를 배워서 온전하게 된 사역자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를 분석하게 되면 "진리를 깨달은 우리가 생명을 번성케 하고 부흥케 해야 되는 의무를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시고 다른 존재를 위로하게 하시는 임무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추기시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애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인간은 위로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위로 받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에게 위로 받지 못한다면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고 한다. 심지어 그렇지 못하면 동물이나 식물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자기 근처에 두고 살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그밖에 다른 사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인간의 심연 속에 위로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 얼마나 자기를 발견하고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동식물, 사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더라도 그렇게 위로하는 것이 그러한 종류를 통해서 하나님이 위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상이 없다면 실망하고 낙심하게 된다. 그리고 제한적인 위로에서 끄치고 만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위로하시고자 지금도 애교를 보이시고 있는 데도 ‘바’자 ‘보’자 같은, ‘등’자 ‘신’자 같은 우리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애교를 체험하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지금도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애교이며 관심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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