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강은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도시와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심지가 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 성장하는데 생명의 젖줄이었으며 물건을 운반하는데 필요한 교통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종교가 발생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어왔다. 그리고 부요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통로였으며 무역을 시도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었다.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근원지가 될 수 있었으며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성경에 처음 시작되는 네 개의 강은 지명 적인 의미의 강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 있으며 은혜의 근원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네 강에 대한 의미와 영적인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째 : 비손(피쉬온)으로 발음 하윌라 특산물이 금, 베델리엄, 호마노가 있는데 아라비아를 포함한 인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부하게 흐른다, 자유롭게 흐른다, 차고 넘친다, 거저 준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 넘쳐흐르게 하는 존재
둘 째 : 기혼 구스(바벨론의 가시인들의 땅) 페르시아만과 홍해 사이에 있는 아라비아와 나일강 사이에 있는 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흘러넘치다, 터져 나온다, 분출하다, 터치고 나아가게 하는 존재
셋 째 : 힛데겔 티그리스 강의 다른 이름으로 앗수르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빠른 화살, 급류, 민첩하고 예리한 존재
넷 째 : 유브라데(페라트)로 발음 약속의 땅의 동쪽 경계 바벨론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 닫다, 능력, 폭발하는, 감미, 달콤한, 돌진, 솟아나오다, 흐른다, 결실한 것의 목표를 이루는 존재
네 강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지면상으로 다 할애할 수 없지만 잠시 언급해 보기로 하자. 강이 흘러가는 방향이 서로 다르지만 근원지는 하나님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무와 물고기가 많이 있고 흘러가는 곳마다 소성케 되고 번성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오늘날 강물이 죽어 가는 환경 상태를 본다면 너무나 씁쓸하다. 이뿐만 아니라 영적인 강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스겔의 강이나 창세기의 강처럼 교회마다 흘러나와야 하는데 생명의 강이 흘러나오지 못하고 더럽고, 썩고 죽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면 이런 강물이 흐르지 않도록 물을 바꿔야 한다. 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더럽고 추한 인간의 모습과 냄새가 썩어서 흐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어진 우리들에게 순수한 물이 흘러나와 살려내는 강물이 되어야 하겠다.
큰 도시마다 강들을 끼고 있다. 문명이 발달되고자 한다면 강을 개발하는 것처럼 사람들 속에 있는 강을 개발해야 한다. 자신들 속에 예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고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면 자신의 강을 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에 언급된 강의 흐름은 하나님의 사상인 말씀이 전 세계로 흘러가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내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인 강이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창골산 봉서방이란 카페에다 제 글이 실려 전 세계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제 글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거나 인용하여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은 이 글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거나 감동받았다는 댓글보다는 내 영혼이 살았다고 하는 표현을 보고 싶다. 의정부에서 목회할 때 어느 후배가 윤석전 목사에게 푹 빠져 8시간 이상 기도하고 금식하는 등 목회전환점을 맞이한 그에게 원어에 대한 개념정리를 전했더니 이틀 동안 고민한 결과 그가 갖고 있던 설교 테이프와 서적들을 버리고 원어성경 공부를 하여 오히려 저보다 더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다.
말씀을 증거 하러 가면 나를 살려준 목사가 있다고 간증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원어성경칼럼을 읽고 자신이 영혼이 살아날 정도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제한 글로는 표현의 한계를 가지는 글은 영혼을 살려내는데 쉽지 않다. 그래도 글을 써야 하기에 혼신을 다해서 글을 집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전하지 말라고 해도 깨달은 진리는 그 입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가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깨닫게 해 주셨다는 간증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빌면서.......
'퍼온글모음 > 창골산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려를 극복하는 길 (0) | 2007.11.13 |
---|---|
또 다른 뜻을 갖고 있는 평화 (0) | 2007.11.13 |
隱密(은밀)한 중에 하는 것 (0) | 2007.10.20 |
진정 고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0) | 2007.10.12 |
시편 23편 속에 숨어 있는 내용 (0) | 2007.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