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로 ‘샬롬’은 “번영, 고요, 안식, 하나가 됨”으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인사로 사용되는 단어로 헬라어에서 ‘에이레네’라고 표기한다. 특히 히브리어는 철자 하나하나가 구문이나 문장으로 되어 의미 분석을 단순히 명사화하기로 어려운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헬라어도 철자보다는 어근이나 동의어, 문법 시제에 따라 의미 분석하기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면 아주 쉽고 올바른 개념으로 접근하여 하나님의 의조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에이레네' 단어가 '에이로'(to join 결합하다, 하나가 되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히브리어는 무릎 관절 부분이나 기계의 연결이 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샬롬’이란 단어는 단순히 인사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이 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즉 비유로 한다면 허벅지와 정강이를 서로 연결하고 있는 무릎 관절이 서로 맞물려 잘 움직이듯이 활동의 차원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나 일치, 평화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적인 입장에 표명해야 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리스도 예수가 연결고리가 되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평화라고 하며 화해,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연합되지 않고 신앙을 논한다면 벌써부터 어긋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이며 활동의 지장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님과 연결이 잘 되어 움직이는 상태가 유지한다면 번영하게 되며 고요를 느낄 수가 있으며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요는 주변에 아무런 소용돌이가 없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참 안식을 누린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와 국방부 차원에서 하리케인의 주요 핵심부 근원을 알기 위해서 공군조종사들이 위험을 무릎 쓰고 하리케인의 핵심부인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폭풍과 번개와 천둥으로 인해 비행기 기체가 너무나 심하게 흔들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갔을 때 거기는 비바람도 번개도 천둥 소리마자 없었다. 너무나 고요함을 느낀 조종사들은 그 속에 하나님을 찾았으며 기도하고 찬양했다는 실화가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위험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발견하는 것이다. 어느 미술전시회에서는 평화라는 주제아래 전시된 그림 중에서 폭포 옆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의 보금자리를 그린 그림이 제일 멋진 그림으로 전시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림으로 인정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마치 노을 낀 저녁에 예배당 종소리를 듣고 안식을 누리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의 차원도 될 수 있다.
존 베일리 목사가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인 곳에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설교했다. 그날 밤 공습으로 인해 한잠도 자지 못하는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도 방문한 목사의 딸은 곤한 잠을 청할 수 있는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그 다음날 그 아이에게 어떻게 폭탄이 떨어지는데도 잠을 잘 수 있었니? “목사님께서 어제 설교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품 안에 있다면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라는 신앙고백을 듣고 회개했다는 고백을 표현했다.
히브리어로 ‘솨바트’라고 하는 안식일은 예배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라는 차원보다 더 높은 주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정착되고 잇는 차원으로 점검하는 시간의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 ‘평화’인 단어인 ‘에이레네’와 ‘멍에’라는 단어 ‘쥐고스’(짝짓기, 예속, 법, 의무, 계시록에서는 저울) 단어와 전대, 허리 띠, 주머니라는 ‘조오네’라는 단어에서 내용이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같은 체격의 소의 등에다 ‘멍에’를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서로 균형이 되지 않으면 ‘저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달란트라고 단어도 화폐 단위만이 아니라 무게 단위로 사용하고 있는데 “균형을 잡다”는 ‘딸란또’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재주, 은사’라는 의미는 ‘상대방과 나와 서로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균형을 잡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평화는 일반적인 개념은 전쟁이 없고 아무 걱정근심도 없는 차원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과 올바르게 연결되어 연합되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은총으로 연결된 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는 것도 진리이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되어 있다.
히브리어 단어인 “안다(야다)라는 의미도 단순히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이는 아교풀처럼 아주 단단히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서로 떨어질 때는 붙어있는 부분 이상의 것이 떨어져 나가 서로 고통을 주게 된다. 이런 상태를 염려 걱정, 근심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단순히 단어나 문법적으로 해석하여 개념정리 없이 내놓는다면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좌충우돌 혼란만 야기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이 올바르게 인식한 뒤 성경을 가르쳐야 하며 전해야 한다. 원어성경을 번역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한국 성서공회와 한국교회는 인식하고 교권주의와 개 교회주의적인 자만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광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광야와 같은 의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세상에서 말하는 광야는 물이 거의 없어 항상 기후가 메말라 있는 상태에서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인적인 드문 사막과 같은 황폐하고 거치른 땅으로 알고 있다. 이런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복음을 외쳤고 심지어 예수께도 복음을 외친 곳이다.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왜 광야에서 복음을 외쳤을까? 사람이 많은 도시의 광장이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는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 심사숙고해야 되지 않은가?
히브리어로 광야라는 단어는 ‘미뜨바르’라고 부르는데 ‘미’라는 단어와 ‘따바르’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미’는 무엇이 임하는 장소‘라는 의미이며, ‘뜨바르’는 ‘따바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질서 있게 정돈된 말씀’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미드바르’는 ‘질서정연한 말씀이 임하는 장소’를 “광야”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신 이유가 어떤 지형적이고 환경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 광야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 많은 도시나 광장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인 광야에서만 복음을 선포해야 되는 차원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이 아닌가?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물러야 하는 장소 광야는 바로 내 안에 말씀이 올바르게 임하는 장소로서 광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말씀이 제대로 임하지 않는 화려한 도시인지 제대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간혹 광야교회라는 이름을 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만 말씀이 질서 있게 정돈된 말씀이 임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말씀이 제대로 임하는 곳이 되려면 광야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도시는 이미 질서 정돈된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질서를 잡아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반면에 광야는 아무 것도 계획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질서 정돈의 상태를 잡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안에 말씀이 제대로 임하는 장소와 존재로 되어지는 것이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광야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미 대형교회나 중형교회는 질서가 잡혀 이런 내용의 설교나 올바른 개념의 성경공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은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힌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교회보다는 좀 무질서한 교회에서 질서를 잡아 주는 설교를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료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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