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이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 성막이 등장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 이유는 생소한 내용인데다 이스라엘 문화 속에 담긴 건축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출애굽기 전체 중에서 절반 이상을 성막의 건축 과정이나 방법, 재료 열거, 성막에서 행해야 하는 법도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막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하고 많은 저서들이 나왔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집어주지 못하고 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분을 의미하고 있다. 성막의 덮개가 4가지 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의 피부도 4개 층으로 되어 있다고 의사의 조언이 있었다.
즉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하는 장소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주와 연합하는 곳으로 주님과 한 몸이 되며 한 머리가 되어 하나님의 사상을 채우는 귀한 장소로 신앙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히브리어로 성막은 ‘미쉬칸’인데 “정착하여 영구히 머무르다”라는 뜻의 ‘솨칸’에서 유래된 단어다.
이스라엘이 처음 성막을 제작하여 활용했던 당시는 이동식이었지만 차츰 발전하여 성전으로 고정된 장소 한 곳으로 제한하다가 성당, 예배당, 교회로 발전되었음을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화려한 건물로 변하여 성전, 예배당, 교회로 둔갑되어 있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 건물들이 주님의 몸이나 육체의 부분을 의미할 수 없다.
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는 한 영이라(고전 6:17)하신 말씀의 의미처럼 성막의 주인공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정착하여 영구히 머무르는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장소가 바로 성막이다. 그런데 건물을 강조하거나 어떤 장소를 제한한다면 성막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의 중요성을 배척할 수 없을 수 있으나 성막을 친히 설계하시고 지휘 감독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임재하심 속에 만날 수 있는 모형을 만드신 것이다. 성막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도 비유했지만 성막이 나의 몸으로 뒤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내 안에 임하실 장소인 성막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라”(고전 3:9)고 했고 “너희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했으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고 기록되었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건축을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건축헌금을 계속 하고 있는 이유는? 건물인 교회건축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루어져야 할 성전건축을 의미하고 있다. 성전건축은 건물인 교회가 다 지어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정착하여 영구히 머무르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성전건축의 완성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곳,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는 곳, 죄 지은 사람에게 죄로부터 절대적인 해방을 얻을 있는 곳이 바로 성막이다. 또한 신앙인의 신앙행로의 예표이며, 마음에 영으로 세우는 교회의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이정표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히브리 민족, 즉 물을 건너온 민족, 경계를 넘어온 민족만이 들어갈 수 있다. 홍해를 건너오지 않고,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오지 않고는 성막에 들어갈 수 없음을 성경 여러 군데서 지적하고 있다. 건너오지도 않았는데 성막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몸은 건너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애급에 머물고 있는 한심한 사람들 바로 나인 줄을 그리고 내 꼬락서니가 어떤지 우리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보라. 울산 어느 분이 문의해 오기를 어떻게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는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살과 뼈, 피가 움직이고 있다면 내 것인지 주님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가면 영분별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성막은 성경 전체를 압축해 놓은 농축 액기스로서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죽 옷을 입은 것이 바로 성막의 사건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계획 속에 구원하신 것도 성막의 사건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장사한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성막의 사건이다.
외관상 그럴싸하게 보일지 몰라도 아직 완성의 단계는 묘연한 데 다 지었다고 말씀의 연장을 놓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그냥 놔뒀다가는 그 주변이 더러워서 구원하신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할 것이 남아 있는가?
한강에서 보트 놀이하다가 목사와 국회의원이 강물에 빠졌는데 소방대원들이 목사는 놔두고 국회의원을 먼저 구조했는데 그 이유는 한강물이 오염될까봐 빨리 구조했다는 재미있는 유머가 있듯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았음을 엄청나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성막의 재료 중, 은으로 제작하는 기구가 있는데 은은 창피하다, 부끄럽다 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케세브라는 단어로 생명의 속전을 의미하고 있다. 내가 먼저 구원받은 부끄러운 존재임을 안다면 손가락 받는 짓은 앞으로 하지 않을 것인데 예수 믿는답시고 더 악하고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음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고 있다.
손가락 짓 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실체인 주님이 내 안에 정착하여 영구히 머무는 상태가 된 곳을 의미하고 있다. 성막은 하나님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으로 채워짐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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