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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만지고 여자는 못 만지게 하신 것은?

여수룬1 2008. 4. 7. 14:45

남자는 만지고 여자는 못 만지게 하신 것은?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의 주님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다. 얼마나 영광이며 기쁨이 되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녀와 대화하면서 느닷없이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한 말씀이 너무나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같은 장 24절 이하로 보면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의 몸을 만지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 때 당시도 이스라엘이 과거 한국처럼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만질 수 없고 도마는 남자이기 때문에 만질 수 있다는 논리 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자는 복음의 상황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남자는 복음의 씨를 소유하고 있어 그 씨를 부리는 사명을 갖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현재 자신이 남자라고 할지라도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남자가 아닌 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을 출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줘야 한다. 따라서 여자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된 말씀을 전하는 상태가 되면 여자의 역할이 아니라 남자의 역할을 당연히 감당해야 한다. 이로 인해 강단에 여자가 서야 되느냐? 아니면 설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성경에서 의미하는 남녀의 구분을 정리할 뿐이다.

 

   12 제자 중 도마에게 내 옆구리를 만지라고 허락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임을 확인하는 것도 되지만 주님과 도마가 연합된 관계를 갖고 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람인 도마와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주님과 한 몸이 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나의 과거 사건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가 제자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번뇌하고 고민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내용의 설교나 주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도마가 산과 들로 아니면 해변 가를 거닐며 방황한 것은 믿음의 상태에서 의심하거나 불신한 상태가 아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과 자신이 한 몸이 되어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으며 인정할 수 없음을 갖고 번뇌한 것이다. 의심의 차원이 아니라 어찌 죄 많은 내 몸에 부활의 주님께서 한 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되어 고민한 것이다.

 

   그런데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졌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오히려 만지지 못하게 하신 장면에서 성경의 오역으로 인해 생겨난 헤프닝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원문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메 무 합투)고 되어 있는데 나를 만지지 말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되어 있다. “나를 붙들고 늘어지지 마라”, “나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마라” 영어로는 “Don't hold yourself to me” 또는 “Don't cling to me”라고 번역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마리아야! 이제 수다를 그만 떨고 있을 만큼 무덤 안에서 계속 지체할 수 없다. 아직도 부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있는 사람이 많다. 부활의 몸인 나와 한 몸이 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연합된 몸으로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졌음을 세상에 알리며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부활의 사건이 과거에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태복음 1:18과 같이 예수의 탄생하심이 계속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부활의 사건도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재진행미래완료형)

 

   마리아야! 나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한 상태다. 내가 아버지에게로 가서 (나와 네가 한 몸이 되도록 하는)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을 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로 가야만 하니 나를 지체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올바르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목회나 선교로 아니면 교회 봉사나 구제, 교사나 찬양대의 일원으로 열심히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동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주님의 일은 어떤 인간적인 행위와 노력의 소산물이 아니다.

 

   차후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하고 요한복음 6:29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동떨어진 다른 것을 믿으려고 하고 있다. 요한일서 3:23에도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름에 대한 의미, 믿는다는 의미가 너무나 방대하여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자. 그러나 아주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단순히 예수의 이름(닉 네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를 의미한다. 믿는다는 차원도 나의 이성과 지성을 동원하여 믿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주님과 한 몸이 되고 마음이 하나 되어 내 생각으로 지배되었던 구조에서 주님의 생각으로 지배되어 교환되고 전환된 상태가 바로 주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것이 쉬울 것 같은데 사실은 너무나 어렵고 무겁다. 어떤 독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냐고 질문해 오는 분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쉽게 그리고 가볍게 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폐일언하고 남자는 만지고 여자는 못 만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과 관계형성을 새롭게 하는 차원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는 연합의 결정체로 뼈와 살이 있는 주님의 몸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조직과 세포가 되어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와 인식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만낏했으면 한다.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