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모음/창골산 칼럼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가는 이유는?

여수룬1 2007. 11. 26. 12:03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가는 이유는?

 

마태복음 7:13~14에 나오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하고 말씀을 고찰했다. “좁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테노스’라는 단어는 “좁은 장애물이 가까이 서 있으므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테노스라는 단어는 히스테미 라는 단어의 뿌리에서 파생된 단어다. 히스테미는 서다, 붙잡다, 가져오다, 눕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참고적으로 “스타오”의 단어를 비교한다면 (이룩, 참석, 고정, 멈추게, 대표, 지속, 방관)하다, 기적이 일어나다 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단어가 한글로 표현되어 있다 할지라도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좌우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따라서 좁은 길로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주님과 함께 서 있는 그 길이 바로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인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요 14:6), 나는 양의 문이(요 10:7)라고 하셨다.

 

주님의 손이나 팔을 붙잡는 것이 “영접”이란 단어를 표현하는 것인데 주님과 한 몸이 된 상태에서 주님을 붙들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좁은 길로 가는 것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주님과 연합된 몸으로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주께서 주신 말씀을 적용해나가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좁은 길과 좁은 문을 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짐승의 속성을 제거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뜻인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런 말씀을 적용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들이 단어 속에 하나님의 계시로 나타난 것이며 주님의 사상과 의도하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해 나가는 것이 사람의 편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바로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여기서 좁은 길이라 함은 놓여 있는 길 좌우편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전혀 없으며 좌우편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헛디�다가는 타잔 소리를 내면서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좁은 문도 마찬가지 문 옆에는 담장이나 다른 어떤 공간이 없는 문만 달랑 설치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본인이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중에 임금의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그 중에 보위를 물려줄 아들을 선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보물을 찾아오라고 분부했다. 세 아들이 왕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동안 성문 앞의 길을 금으로 깔아 놓았다. 보물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왕자 중 첫 아들은 보물을 찾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금으로 포장되지 않은 오른쪽으로 슬금슬금 들어왔으며 둘째 왕자는 오른편 말발자국을 보고 왼편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셋째 왕자는 금으로 포장 길 위로 당당하게 들어옴에 따라 왕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나의 어떤 공로가 있어서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아래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는 그리스도가 길을 만들어 놓으셨고 스스로 좁은 문이 되신 주님이 계시기에 당당하게 걸어가야 하며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가는 것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의미 중에 아주 중요한 개념은 주님과 함께 무엇을 이루어내는 지속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만 좁은 길로 들어가거나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좁은 길로 가야하며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한번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적용해 나가는 지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의도를 너무나 문자적으로 단순하게 보기 때문이다.

애급에 머물던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못 가는 길이기 때문에 주님의 생각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좁은 길로 갈 수 없으며 좁은 문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일련의 생각들을 잘라내고 깨뜨려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을 잘라내고 깨트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에다 의식에다 마음과 몸에다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주님과 연합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는 운명의 길도 아니요, 고난과 광야의 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 나만이 져야 하는 십자가로 오해하고 있는 그 길과 문이 절대 아니다. 불교에 표현하는 업보도 아니며 내 팔자도 아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부터 바꾸는 것이 바로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다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그런 길을 끝내 가기를 원하신다면 바로 넓은 길이요 넓은 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가는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 죽은 나에게 또 다시 고생의 길을 만들어 간다면 그 길은 넓어질 것이요, 그 문은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한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열려져 있는 생명의 길, 하늘나라의 길이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되어 있어 고생의 길로 고난의 문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넓은 길이요, 넓은 문으로 사탄이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요, 문인데 그 분 자신이 길이요, 문인데 무엇이 두려우며 걱정이 되며 왜 갈등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이런 육신의 속성들을 깨트려야 한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신앙인이 장망성을 향해 혼자 가는 것을 묘사해 논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주님과 함께 길을 가고 문을 통과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가는 길은 분명한 목표가 있으며 길이 되어 주시고 문이 되어 주신 그 분과 함께 가는 생명의 길과 문이라면 고민하고 갈등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