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모음/창골산 칼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가는 삶

여수룬1 2007. 11. 23. 17:18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가는 삶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며 가슴에 맺히는 감동과 쓰라린 경험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내 몸으로 지은 죄 때문에 감당하신 것이며 그 분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에 찔리신 것은 내 머리로 지은 생각의 죄 때문이다. 또한 손에 못 박히신 것은 내 손으로 지은 죄 때문이며 발에 못 박히신 것은 내가 가지 말아야 죄 때문이고, 옆구리에 창의 찔리심을 받은 것은 내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계속 끊임없이 묵상한다.

 

그런 십자가의 묵상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또 다른 장소(계 11:8) 애급과 소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으며(칼럼 203호), 시편 23편에 나오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십자가임을 알고(칼럼 274호, 556호) 온 몸과 마음의 전율을 느꼈고, 십자가 처형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놀라운 비밀을 체험했다.(구레네 시몬, 백부장(처형의 총지휘관 로마 장교), 강도, 여자 칼럼 283호를 참고하기 바람)

 

십자가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외형적인 사형수의 형틀로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십자가를 지기까지의 과정에 나타난 고난과 아픔이 너무나 깊이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묵상하는 차원을 떠나 자신이 져야 한다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6:24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올바르게 알았으면 한다. 십자가는 사형수의 형틀로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외형적인 고난과 아픔만으로 이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고와 이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개방하고 우리에게 들어와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존재로 왕래하며 우리를 초대하는 경험을 하자는 것이다.(구약성서학자 이양구 박사 저서 신학과 신앙의 자주성을 향하여 참고 73p.)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지고 가면서 그 정돈된 말씀과 하나로 동참해 가면서 육신의 속성을 깨뜨리고 죽여 나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여기서 육신의 속성을 깨뜨리고 죽인다는 의미는 내가 할 수 없음을 먼저 인식하고 주님의 말씀을 내 삶 속에 책임으로 적용해 나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 내 속에 숨어있는 짐승의 속성이 죽어져 나감을 체험할 것이다.

 

여기서 책임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개념이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많아져라, 충만 하는 것은 바로 책임으로 맡으라는 의미로 본다면 믿음 충만,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은 가득 참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책임을 갖고 믿음생활, 은혜생활, 성령의 삶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또한 충만해 진 상태는 할례를 받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나를 다스리고 통치해 나가는 왕이 된 것을 책임으로 맡은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를 다스리고 예수와 함께 왕이 된 것을 책임으로 맡아 하나님께서 하명하신 뜻을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는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절대로 흉내를 낼 수 없으며 아무리 유능한 영화배우라 할지라도 그렇게 십자가를 질 수도 없으며 재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재현해보려는 아둔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이 진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을 이룬 것뿐이다. 바로 우리도 주님과 똑같은 십자가를 또다시 지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함을 깨닫고 예수와 함께 이미 십자가를 졌으며 십자가 위에서 함께 죽었고 삼일 만에 장사지내었다가 부활하여 부활의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데 또 다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성도님은 본인만이 져야할 십자가는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한다. 나 자신이 묵묵히 그 길을 따르며 믿음으로 이겨내는 길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십자가는 본인이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 생각한다고 한다. 무엇의 어떤 십자가인지 모르겠지만 주님께서 요구하는 십자가는 아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완벽함 작품으로 끝나 막이 내렸다는데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아픔과 고통의 길을 잃어버린 채 현실을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의 존재를 상실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려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맞은 채찍과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못 박히시는 고통과 아픔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참혹한 고통의 아픔을 아주 절실하게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잃어 버린 채 현실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이 믿음의 존재를 상실하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믿음의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시다. 그 분을 잃어버리는 그 자체가 바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대환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실이 맞추어 살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일까? 그 어느 누구하나 현실을 도피하며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현실을 맞추지 않고 살아가려면 산 속이나 어느 무인도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말이다. 십자가는 현실과 함께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상과 의도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증명하며 이루어나가고 열매를 맺으며 나를 다스리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히브리어에 담긴 의미다.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가면서 아픔의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느끼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라는 말은 아직도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어만 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과 아픔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내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아픔과 고통이 바로 십자가 고난의 아픔과 고통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예수께서 경험하신 고난과 아픔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아픔의 강도가 아주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느낀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경험하셨던 그 아픔의 느낌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달리실 때 경험하신 고난과 아픔의 고통을 다시 느끼거나 누구와 나누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그 광경을 봤다고 할지라도 그 경험을 아주 미약하다. 예수와 한 몸이 된 상태라고 하는 인식을 가져도 그런 체험은 너무나 이론적일 뿐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말씀을 이루어져 열매로 익어가는 과정이 바로 고난이요, 아픔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난이란 의미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과정에서 얻는 강한 체험들이 바로 고난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칼럼 557호)

 

이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말씀을 적용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