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상고 자료사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3

여수룬1 2007. 11. 14. 13:22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편에서 다뤘던 것처럼 고인돌문화는 [ 마문명 -> 한반도 남부 -> 한반도 북부 -> 만주]로 전파된다.

 

[지구 기온 변화표]

 

추웠던 기후가 점점 더워지면서 현재의 해안선은 8천년전에 완성된다. (지금과 8천년전의 기온이 대강 같다.)

그런데 그후 기후가 계속 더워져서 6천년전 ~ 3천년전에 기온이 최고로 높아지고 그 후 차차 식어서 지금에 이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온변화와 문명전파 등의 이유로 고대한국의 수도는 [한반도 남부 -> 한강 -> 대동강 -> 압록강]으로 이동했다고 본다.

 

더워지는 기후에 따라서 고대한국의 중심지도 북상하게 된다.

대강 말하자면 8천년전에 고대한국의 중심지가 한반도 남부, 중부였다면 지금보다 더웠던 6천년전에는 고대한국의 중심지가 한반도 북부, 만주였다는 것.

 

만주서부 홍산문명이 6천년 전에 시작한 것도 그때쯤 되면 북한과 만주가 지금보다 더 따뜻했기 때문.

본래 문명은 적당한 기후가 되어야 활발히 발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더욱 그렇다.

 

( 홍산문명은 고대한국 중심지는 아니다.

압록강 유역에서 홍산문명보다 훨씬 더 많은 피라미드 등 고대 유적 유물이 훨신 더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도.

 

압록강 유역에는 홍산문명보다 말하자면 수백배는 더 많은 유적유물이 있다.

대부분 고구려 거로 '둔갑'되어 있거나 비공개로 창고에 감추어 놨다.

 

중국당국이 홍산문명을 부각시킨 이유는 그 지역(만주서부)이 압록강보다 더 중국에 가깝기 때문.

중국당국은 동북꽁정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압록강 유역의 유적 유물들을 급격히 부각시킬 것이다.

특히 집안시와 환인시 지역의 것들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은 고대한국의 주요영역을 시대별로 대강 그린 것.

물론 8천년전 이전에도 문명은 세계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시작한 고대한국문명은 또 다른 발전을 보인다.

그래서 7천년에 시작된 산동반도 북신문화나 6천5백년전에 시작된 대문구문화

6천년전에 시작된 홍산문화 등은 8천년전 이후에 다시 시작된 (황해 마문명과는 또 다른)고대한국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해뜨는 모양(아침 단())을 나타내는 그림 아래 산(당시에는 땅, 산이 ‘달’이라고 불렸음)이 그려져 있다.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유물로 추정한다.

-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5260044

 

위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의 토기.

아사달( 해뜨는 땅, 해뜨는 산) 무늬가 그려져있다.

산동반도가 오래전부터 고대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은 고인돌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후대에 공자도 산동반도 지역 출신이고 [동방불패]라는 말은 중국 동해안 특히 산동반도 쪽 사람들이 뛰어나다는 말.

 

북신문화, 대문구문화, 홍산문화는 당시 중국내륙 문화와 많이 다르다.

당시 한반도, 만주의 문화와 비슷하다. 

돌무덤, 빗살무늬 토기 등 또 하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변화.

황해마문명의 영향 등으로 대체로 세계는 모계사회였는데 고대한국에서는 부계사회로 바뀐다.

그래서 홍산문명에서도 원주민은 모계사회(여성지도자)이고 고대한국에서 간 환웅씨는 남성지도자.

 

황해마문명의 전파로 세계는 신석기혁명이 일어나고 (대략 1만5천년전~ 8천년전)그 바탕위에 세계에 다시 고대한국(환인씨 나라)문명이 전해지는 것.

(8천년전 이후 - 이들을 통칭 [아리안(알이안)]이라 한다.)  

 

산동반도 북신문화는 7천년전에 이미 시작되는데 만주서부 홍산문화는 천년 늦은 6천년 전에 시작되는 것은 그 사이 지구기온이 올라가서 6천년 전에는 만주도 많이 따뜻해진것.

( 6천년전 당시 만주는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

 

지구기온은 6천년전~3천년전 가장 따뜻했다.

그래서 이 때에 고대한국문명은 시베리아 등 북부로도 많이 전해졌다.

당시 시베리아는 지금보다 많이 따뜻했으므로.

 

 
빗살무늬토기(한국)
 
 
 



빗살무늬 토기 (한국)

 

  

빗살무늬토기도 한국이 원조. 

8천년전 것도 발견되었다. - 강원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그런데 희한하게도 빗살무늬토기는 북쪽으로만 전파된다.

6천년전~3천년전에 지구기온이 가장 따뜻했을때 고대한국문명이 시베리아로 활발히 전파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

그 시기에 빗살무늬토기 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대한국문명이 시베리아로 전파되었는데 이를 거꾸로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문명이 전파됐다 하면 곤란하다.

시베리아는 너무 추워서 당대 고도문명이 자체 발생, 발전되기가 어려운 곳.

시베리아가 비교적 따뜻했을때 남쪽에서 문명이 전파된 것.

 

( 바이칼리안(밝할인)이 황해평원에 온것은 그보다 훨씬 전 일이고 그들은 별다른 높은 문명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바이칼 호수 지역 유물발굴로 알 수 있다. )

 

위 그림을 보면 고대한국인들은 시베리아를 건너 북유럽까지 가고 있다.

북유럽은 백인의 발생지로 추정되는 곳인데 원조 백인들은 머리카락이 탈색돼서 하얗다. (은발)그런데 게르만은 머리카락이 빨간색 등 여러가지.

이는 원조백인들(하얀머리)과 고대한국인들(검은머리)은 혼혈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 동쪽에 [아무르]라는 강이 있다.

 



아무르강 유역 꼰돈에서 발굴된
아무르 여인상 (4천년전)

 

 

세계 고고학계에서 [아무르의 비너스]라 불리는 위 여인상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 편두문화는 가야, 신라의 편두와 같다.

 

[위 여신상에 대한 연합뉴스의 보도]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453578§ion_id=103&menu_id=103

 

위 여인상은 4천년전 것인데 당시에는 지금보다 많이 따뜻했고 아무르강 유역으로도 고대한국인들이 상당수 이동해 간 것으로 본다.

[아무르]라는 이름도 고대한국인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르는 [아물] 즉 [아(해뜨는 동쪽)에 있는 물]이라는 말로 본다.

 

날씨가 지금보다 더웠던 8천년전 이후의 문명전파는 대강 남한보다 북쪽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난생신화는 대략 한국 이남 위도 지역에 널리 퍼져있고 천손신화는 대략 한국 이북 위도 지역에 널리 퍼져있다.

위그림은 [난생신화와 천손신화의 주요 지역]을 대강 그린 것. (퍼온 그림) 

 

천손신화지역 즉 [범 알타이 지역]은 주로 8천년전 이후에 문명이 전파된다.

또한 그래서 그 지역에는 부계사회의 전통이 강하다. 부권이 비교적 쎄다.

7천년전에 중앙아시아에 나타났다는 [아리안]도 저 경로를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본다.

물론 고대한국에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이동해 갔을 것이다.

한국의 [홍익인간]정신이 괜히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실제로 후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브라만)은 인도 북쪽에서 남하한다. 

 

8천년전 이전에는 고대한국인들(마문명인들)이 주로 한국보다 남쪽지방으로 많이 이동해간다. 지구가 지금보다 추웠으므로.

동남아 등지에는 비교적 모권이 쎄다. 이는 모계사회였던 마문명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 난생신화 천손신화는 근본적으로는 같다. 알을 알이라 부르는 것은 알이 태양처럼 둥글기 때문. 고대한국에서 태양은 [아, 알, 안] 등으로 불린다.

훌륭한 인물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말하자면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다는 것. [한국]할때 [한]이라는 한국어는 [하늘, 태양]을 뜻한다.)

 

위 그림의 [난생신화] [고인돌] 그리고 [쌀농사]의 전파는 주로 8천년전 이전부터 많았던 것으로 본다.

물론 마문명은 8천년전 이전 당시 지금보다 훨씬 더 많고 컸던 태평양의 섬들로도 퍼져나갔을 것인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이 된 것이 [잃어버린 무대륙]이라 본다. 

 

8천년전 이전 - 남쪽 지방 위주로 전파

8천년전 이후 - 북쪽 지방 위주로 전파

 

즉 그 시대의 [대강 현재의 한반도와 비슷한 기온 정도]의 지역으로 문명이 전파돼 나간 것.

 

( 중국에도 난생신화, 천손신화가 전파됐겠지만 후대에 '중국의 자존심' 때문에 많이 전승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8천년전 이후에 대강 만리장성 이북의 대초원 지역을 따라 이동한 [아리안]들은 이미 7천년전에 중앙아시아에 나타난다.

그리고 중동(수메르), 이집트, 유럽, 인도로 퍼져나간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즉 수메르 문명은 대략 6천년전 ~7천년전 사이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문명을 가지고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문명.

최근 들어 수메르문명의 언어가 한국어와 많이 비슷하다는 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진실은 계속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시간문제. 

 

터키가 그토록 먼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데에는 이러한 고대역사가 숨어 있다.

터키가 지금 혈통적으로는 한국인과 같음이 적지만 그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문명의 시조]가 한국에서 왔다는 얘기.

터키가 중국한테는 형제의 나라라고 안하면서 왜 유독 한국한테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지 유념해보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장식보검 (국립경주발물관 소장 - 보물 635호)

 

위 보검은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한 것이고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것은 카자흐스탄과 이란 밖에 없다.

 

신라는 고조선의 진한인들 중 만주서부에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서 지금의 경상도 지역 원주민과 만나서 생겨난 나라.

그래서 신라유물에는 알타이계 유물이 많이 나온다.

알타이는 만리장성 이북 초원지대.

즉 8천년전 이후 지구가 지금보다 더웠을때 고대한국에서 퍼져나간 [아리안]들이 살던 지역.

 

위 보검은 [아리안]의 전통을 일면 보여주고 있다 본다.

특히 삼태극. 

 

위 보검과 유사한 것들은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와 중동(이란)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대한국을 출발한 [아리안]이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동으로 진출한 한 예라 하겠다.

물론 저 보검의 연대가 예를 들어 꼭이 7천년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지금도 한국에서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움직임이 있듯이 [아리안]의 후예도 그 선조의 전통을 재현한 것으로 본다. 

 


[알타이산 북쪽 파지릭 고원에서 발견된 그림]

-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지 박물관 소장.

  

위 그림에 보면 동북아인 지도자에게 아랍계 기사가 따르는 모습.

앉아있는 동북아인이 크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도 계급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원조 아리안]은 동북아인이고 중동으로 문명을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안]은 인도에 들어와서 [브라만]이라 불리고 그 후손 중에 한 분이 석가부처님.

그러므로 석가부처님은 고대한국의 후손이라 본다.

 

석가부처님은 왜 귀가 길까.

백제, 신라 유물에서도 보이듯이 고대한국에서는 특히 신분이 높으면 남자도 귀걸이를 했다.

대체로 신분이 높을 수록 큰 것을 했을 것인데 그래서 귀가 늘어진 것으로 본다.

석가부처님이 귀가 길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불상 등에서 긴 귀로 표현 한 것은 신분이 높은 집안이라는 의미로 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3천 5백년전 알타이 파지릭 카페트 - 복원품  

http://www.carpetworldwide.net/pakistan/pakistan-1-1-2.htm

 

[아리안]은 3천5백년전에 이미 저러한 카펫을 만들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왜 널리 알려지지 안았냐면 그동안 세계사가 백인 위주로 많이 쓰여져서 그렇다.

백인들이 세계고대사학회에서 세력이 강했으므로 세계 고대사가 유럽지역에 [유리하게] 홍보되었다.

유럽에서 멀수록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시아 고대사는 중국에 유리하게 홍보되어 왔다.

만리장성 이북, 한반도 등 중국 바깥지역 고대사는 폄하되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중국황제들이 여러번 한국역사책들을 없애라고 명령을 내리고 실제로 조선 임금들이 조선팔도에 명령을 내려서 한국역사책들을 거둬서 없애버린다.

그리고 후대에 일제도 한국고대역사책들을 전국에서 거둬다가 없애버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만 남겨놓는다. 그게 제일 만만하니까.

삼국사기는 좋은 면도 많지만 사대주의 성향이 많이 들어가 있고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삼국유사는 '동화식'으로 쓰여져 있다.

일제는 '만만한' 이 2가지 한국사서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버리던가

일본으로 가져다가 꼭꼭 숨겨놓는다.

일본 왕실 도서관 창고 깊숙한 곳 같은 데다가.

 

중국과 일제의 오랜 한국고대사 말살 공작으로

한국 고대사서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몇가지 간신히 전한다는 몇가지 사서도 '진위논란' 등으로 발목이 잡혀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세상이 점점 더 개명되고 과학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한국고대사의 진실, 세계 고대사의 진실은 살아나고 있다 하겠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 기사의 말에는 콧잔등과 가슴에 [곡옥]이 달려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라 천마총 금관]

위 신라금관에도 수많은 [곡옥]이 달려있다.

신라유물에는 수많은 [곡옥]이 발견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신라 금허리띠 ]

위 허리띠에도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백제유물 - 최근 부여 왕흥사터에서 출토

 

위에서 보이듯이 백제도 곡옥을 만들었다.(사진 우상)

 

 

  

위 그림의 동북문명 지역 중 홍산문화에서는

수많은 곡옥들이 나오는데 아래 것도 그 중 하나.

 

 

 

곡옥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홍산문화는 6천년전~4천2백년전 까지의 문화.

홍산문화는 고대한국에서 퍼져나간 [환웅문화] 중 하나.

 

곡옥은 고대한국의 상징 중 하나.

 

그 곡옥이 중동까지 퍼져 나간 것이 위 [알타이 파지릭 그림]에서도 나오고

백제, 신라 역시 당연히 고대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니

곡옥을 많이 만들었던 것.

 

중국에서는 곡옥이 발견되지 않는데

오직 은나라 유적에서만 나온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유명한 나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8천년전 황해가 완전히 바다가 되고

황해평원 마문명인들이 한반도로 다 올라온다.

마문명은 남한 앞바다(서해,남해)에 존재했으므로

마문명인들은 주로 남한땅으로 올라왔을 것이고

처음 고대한국이 세워진 곳은 남한 땅.

 

그런데 8천년전 이후에 지구기온이 올라가면서

고대한국 즉 [한인(환인)씨의 나라]는
한반도 북부, 만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그 중심지도 차차 북으로 올라간다.

 

한국의 수도는 나중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고조선때 한국의 수도는 대동강이 되고

...열국시대를 거쳐서...

고려때 수도는 대동강과 한강의 사이

조선 때는 한강이 된다.

즉 한국의 수도는 남한지역에서 시작되어 북한지역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한으로 내려온다.


처음에는 한강이 한수(漢水), 아리수(알이수) 등으로 불리다가
대동강, 압록강도  한수(漢水), 아리수(알이수) 등으로 불리게 된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북한 이북지역으로도 문명이 전파되고

만주에도 문명이 전파되면서

그 중 하나가 만주 서부 [홍산문명]

홍산문명은 6천년전~4천2백년전이니 지금보다 더울때이고

당시 그 지역은 지금보다 따뜻했다. 

 

그런데 홍산문명도 고대한국 문명전파의 일부일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의 [천손신화 지역]은 대강 [알타이 지역]이라고도 불린다.

8천년전 이후 날씨가 지금보다 더웠을 때 그 지역으로 

고대한국 문화는 활발히 전파되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와 [알타이문화]는 많이 비슷하다.

알타이문화가 한국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원조 고대한국문화가 알타이로 전파된 것.

(물론 나중에는 서로 문화 교류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전편에 [바이칼리안(밝할인)]들이 남하해서

[황해평원 원주민]들과 만나서 진정한 인류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바이칼리안(밝할인)]들은 너무 추운 곳에서 왔으므로

황해평원으로 올 때 별다른 문명은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8천년전 이후에 [바이칼리안(밝할인)]들의 후손들 중 일부가 

다시 [바이칼 호수 지역]으로도 [금의 환향]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 남하했을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문명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