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모음/창골산 칼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까닭은?

여수룬1 2007. 10. 2. 20:48
마가복음 11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배가 좀 고프시다고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만큼 육신적인 분이실까?
 
 사십일 금식까지 하신 분이시라면 굶주림에 대한 신경질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식사는 남들처럼 무화과 열매나 빵으로 아니면 다른 음식으로도 해결하실 수 있다. 굳이 무화과 열매를 먹어야 하셨는가?
그런데 요한복음 4장 34절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고 하셨다. 
 
즉 복음으로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있는지 한번 성찰해야 하겠다. 시장하셨다는 의미는 복음을 전하시려는 예수님의 상태이다.
그러면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바로 사람인 존재를 의미한다. 예레미야 5장 14절에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리고 사사기 9장 11절에 무화과나무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단맛을 내고 아름다운(탐스러운) 실과를 맺는 존재이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면 당연한 저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무엇인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것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의미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난 뒤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신체를 가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잎으로 가리면 가릴수록 말라비틀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막아 보려고 침을 뱉어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하여 보라.
예수님으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인 죄를 가리고 있는 존재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내용대로라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맺을 수 없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런 선포를 하셨을까?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죄만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열매가 있었는데 그 열매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저주받은 결론이 나온다. 풍성하지 못한 열매라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열매가 많이 열리지 못했다고 기죽을 그리고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 앞이라면 숨길 것 없다. 죄든 열매든 있는 그대로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다. 가리지 마라.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찾으시려고 하는 열매를 내놓아라. 가능성이라는 열매, 할 수 있다는 열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열매를 내놓아라. 저주받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