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짐승의 다른 이유는?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말할 수 있다는 즉 언어구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손을 이용하여 창작하는 기능이 짐승과 달리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령이라는 존재 받은 흔적이 있어 그 흔적을 채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성령이라는 단어가 일반 사람에게 생소한 면이 많다. 그러나 동물을 예배당에 데리고 가서 함께 예배드려 보라 감동 받는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원숭이가 진화가 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여기서 증명이 된다.사람은 다 그렇지 않지만 신앙의 행위로서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를 통해 감동하지만 짐승은 감동하지 않는다는 분깃점은 성령의 존재냐? 아니냐하는 것이다.
믿는 신자들 가운데도 성령과 함께 연합하여 생활하는 분이 있는 반면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어쩌면 성령은 신비의 베일 속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귀신처럼 흐믈 흐믈한 뼈와 살이 없는 존재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왜 성령을 일반적인 종교의 신이나 귀신의 종류로 취급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나 신학에서 큰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누가복음 24장39절에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살과 뼈가 있느니라"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영"은 영어 번역으로도 구분되는데 spirit가 아닌 ghost로 번역되어 있는데 귀신에게는 뼈와 살이 없는 존재이다. 죽은 존재가 뼈와 살이 없는 존재로 나타날 때는 귀신과 유령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귀신처럼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뼈와 살이 있는 존재로 나타나셨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가 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고린도 전서 6장17절에 말씀을 보면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뼈와 살과 주님의 살과 뼈가 하나가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된 것이다.
우리 안에서 존재하는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해주시는 것이다. 즉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내게 연약한 것이 없다면 성령의 역할도 없는 것이다. 아니 성령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으로 한다면 성령 훼방 죄라고 말할 수가 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존재이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열심히 기도를 해도 성령을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헛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 속에 있는 사정을 성령께서 몰라준다면 아무리 울고불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훤히 꿰뚫고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려고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내 살과 뼈가 누구의 것인가? 내 것인가? 주님의 것인가?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형체가 들어와 있다면 내 몸이 변하여 새 피조물이 된 것을 느낄 때 비로소 새 사람이 된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을 옆에서 볼 때 누구로 보이는가? 일상적으로 보던 그 사람인가?
아니면 주님이신가? 한번 상상해 보라.
아니면 주님이신가? 한번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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