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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아나스타시스)

여수룬1 2007. 4. 6. 17:05

부활(아나스타시스)

 

     기독교만이 강조하는 부활은 어느 종교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요소다.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진리를 그리고 상식과 역사를 뛰어넘는 내용이다. 헬라어로 표현된 단어는 “아나스타시스”는 ‘죽음에서 부활, 부활시키는 자, 영적 진리의 회복, 다시 살아나는 부활, 주음에서 일어나다, 일어나야만 하는’뜻을 갖고 있다. 억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부활을 의미한다. 누가 일으켜 주는 간접적인 부활이 아닌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는 아주 능동적인 부활을 의미한다.

 

아나시타시스 단어는 “아니스테미” ‘세우다, 일어나다, 들어 올리다, 일으키다, 똑바로 서다, 다시 일어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가 십자가라는 단어인 히스테미와 연관되어 있는데 십자가 앞에만 오면 나의 존재가 똑바로 일어서는 상태로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정립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똑바로 서지 못하는 구부정한 상태였던 인간들이 주님과 연합되어 아주 똑바르게 서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구역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아쉬레’라는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아니스테미’는 ‘아나’(위에, 따로따로, 그리고, 각각, 씩, 모든(사람) 안에, 통해서, 반복, 강렬, 역전)라는 단어와 히스테미(서다, 붙잡다, 가져오다, 눕히다, (거, 지적, 이룩, 참석, 고정, 방관, 대표, 지속, 멈추게)하다)의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여 고정되어 있는 상태로 지속하고 있음을 부활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부활이라 함은 죽고 난 뒤에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부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가운데 지금 현재 주님과 한 몸으로 이루어진 상태를 계속 지속되어 진다는 뜻이다.

 

 

    또 다른 헬라어로 된 부활은 “에게시스”라는 단어는 ‘부활, 죽음에서 재생’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에게이로’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깨우다, 눈을 뜨게 하다, 다시 일으키다, 세우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 다시 일어나다, 들어 올리다’는 뜻을 갖고 있다. 지금의 우리의 육신의 살아있음보다는 또 다른 생명의 눈이 떠진 상태, 그리고 주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서 현재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부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봄기운을 받은 땅 속의 씨앗이 움을 트고 바위를 비집고 나오는 생명의 고귀한 탄생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활은 너무나 신비로운 것이다.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니 가만있으면 바로 그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지만 죽어 있는 상태로 다니는 부류가 너무나 많다.       

 

     또 다른 헬라어의 부활은 “에크사나스타시스”라는 단어는 ‘부활, 죽음에서 일어남’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엑사니스테이”(낳다, 주체가 일어나다, 반대하다, 일으키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에크(원천, 시작하는 시점, ~로부터, ~후에, ~중에, ~에 의하여, 엄청나게 생산해내다, ~에게서, ~로 말미암아, ~으로 만든, ~에게 속한, 원인, 동기, 이유)라는 단어와 ‘아니스테미’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을 의미하는 부활이 바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태초와 동일하다. 우리의 신앙의 동기부여를 가져다주는 부활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신 구원의 은총과 온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옷을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순간이다. 이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우리는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믿는데 치중하고 거기에 목숨 걸고 있는 것이 한심스럽다.

  
 

     부활한 사람은 엄청나게 생산해 내는 잠재력을 갖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낼 수밖에 없어 자재할 수 없다. 어쩌면 극성맞은 신앙인, 일명 예수쟁이가 된다. 예수에 대해서 전문가라는 표현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광신도가 아닌 주님과 합체된 몸이 되어 아주 거대한 힘이 느낄 수 있는 아니 나타나는 부활은 내 안에 거대한 역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 부활의 현장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것은 주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며, 주님의 형상이 내 안에 있기에 서로 알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활하신 주님의 살과 뼈가 내 육신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데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만 되지 말고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며.......

자료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