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이전의 작품 <- 관련글 (누르시면 열립니다.)
( 위글을 안보신 분, 또는 보신지 1주일 넘으신 분들은
먼저 위 글부터 누르시고 보고 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위글은 며칠전에 보강되었고
위글을 안보시면 다음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필자는 위 [황제묘 태왕릉 장군총]을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로 제시한 바 있다.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 <- 관련글
그런데 다시 좀 더 발전적 제시를 하고자 한다.
[황제묘 태왕릉 장군총]은 [집안 중심 평야지대]와는 좀 떨어져 있다.
저 큰 원 안의 지역이 지금도 집안시를 이루고 있는 [집안 중심 평야지대]
그리고 일제의 '스따일'로 볼 때 가장 큰 고대한국 중심 피라미드는
흔적도 없이 없앴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저 [집안 중심 평야지대]를 살펴보았다.
[황제묘] 서남쪽에 집안의 [중심 4거리]라 할만한 곳이 있다.
그런데
작은 도시인 [집안]의 4거리 치고는 특이하게 크다 하겠다.
[집안]에 도시규모에 비해서 저렇게 큰 4거리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인가.
저 곳은 [뭔가 아주 기념할 만한 곳]임을 알 수 있는 분위기.
[집안]은 일제 때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했다.
즉 지금의 도시 구도가 일제 때 생긴 것.
필자는 고대한국 제1피라미드를 없앤 것을 일제의 소행으로 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태왕릉보다 더 큰 피라미드가 건재했기 때문.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현 [집안]에 대한 기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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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묘(皇帝墓) - 황성평(皇城坪)에 있으니,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가히 10장이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왕자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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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나오는데
[침상이 셋]이 있는 [황제묘(皇帝墓)] 등 거대 피라미드들이
10장 즉 20미터 (또는 30미터) 높이로 당시에도 그대로 있었다는 것.
태왕릉은 침상이 2개이니
그보다 더 큰 피라미드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 <- 관련글
즉 고대한국 피라미드들을 훼손한 것은 일제라는 결론이 나온다.
조선 때는 이 피라미드들이 청나라의 뿌리인 금나라 황제 무덤이라고
세간에서 얘기 되었기 때문에
청나라 황실이 그들의 선조것이라 얘기되는 것을 없앴을 리는 만무하다.
( 물론 금나라 때 만든 피라미드는 아니다.
단 금나라 임금이 그 피라미드 위에서 천제를 지냈을 가능성은 많다 하겠다.
그보다 더 전에 고구려, 발해가 그랬던 것처럼.)
저 4거리 지역은 옛날에도 중심 지역이었을 만한 자리.
저기에 [고대한국 가장 중심 피라미드]가 있었을 만하다 하겠다.
[고대한국 제1 피라미드]가.
[고대한국 가장 중심 피라미드]는 일제로서는 [완벽]하게 없앨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 작은 장군총은 그대로 남겨놓았고
좀 더 큰 [태왕릉]은 많이 부숴놨듯이
일제는 고대한국의 크고 중요한 것일수록 치밀하게 부쉈다.
그것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부수려는 일이었으므로.
저 4거리에 제1 피라미드가 있었다면 그것을 [완전히 없앤] 일제 당사자는
그리고 일제의 고고학계는
피라미드는 완전히 없애버렸지만
남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알 수 있도록
그 피라미드의 위치나 크기, 형태(방향) 정도는 남겨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성향이므로.
학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연구분야의 물적 근거가 사라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므로.
이는 장군총을 그대로 남겨놓은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
그래서 '상부'의 지시로 제1 피라미드 만큼은 철저히 완전히 없애버렸지만
[그 피라미드의 자리]는 남겨놓은 것이 위에서 보이는 4거리로 본다.
물론 이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일본 학계의 누군가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장군총]
장군총은 4 모서리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장군총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 동북방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고대한국 제1 피라미드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모서리도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구도는 [집안]의 평야지대의 진정한 중심 구도라 할 만하다.
제1피라미드 자리 땅밑에는 피라미드를 만들면서 돌 등으로 기초공사를 한 것이
아직도 남아있을 수 있다.
땅 위 것은 모두 없애버렸지만 땅 밑 기반은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다.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하겠다.
누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진실은 영원하므로.
장군총은 약 12미터(5층 아파트 높이)이고
태왕릉은 약 22미터로 추정된다.
제3피라미드인 태왕릉이 저 정도 위용이라면
제1 제2 피라미드의 위용은 더할 것이다.
위와 같이 제1피라미드는 [모서리]가 백두산 천지를 가리키고 있다면
제2피라미드는 [면]이 백두산 천지를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 피라미드]
위에서 보았듯이 장군총 등 고대한국 피라미드들은
[모서리] 또는 [면]으로 [의미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위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 역시
가장 큰 피라미드는 4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석촌동 피라미드]의 3번째 피라미드는 그 [면]의 방향이
각도 상 [백두산 천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발굴기록 등에는 [석촌동 피라미드]의 [큰 피라미드]보다
더 큰 피라미드들이 한강변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보존 복원하지 않고 그 위에다가 다 집을 지어버린 것 같다.
'땅값이 얼만데' 하는 논리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손바닥 만한 땅도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는 등
땅을 극히 압축적으로 썼기 때문에
수많은 고대유물유적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아직도 한반도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원래는 세계 고인돌의 대부분이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일제의 극심한 훼손 등으로 수많은 고대한국 유물유적이 없어지고
일부는 일본으로 옮겨져서 일왕실 창고 등에 깊숙히 납치 보관되어 있어서
아쉽게 생각하지만
하지만
진실은 영원하다.
복원과학도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
고대한국사의 복원은 단지 시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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