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모음/창골산 칼럼

혹시 나는 관상용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여수룬1 2007. 7. 19. 21:44
혹시 나는 관상용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오래 전 Marsfield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밑으로는 Lane Cove 계곡이 있어 수  많은 나무들이 눈 안으로 들어오는 숲 속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으로 이사했을 때 정원에 포도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포도가 맺히기를 몇 년간 학수고대 했는데 끝내 포도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과실류가 아닌, 단지 보기 위한 관상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고자 하였으나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서 겉만 화려하게 꾸민 유대 종교의 외식주의에 대한 실상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관상용 유대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외식적인 유대인처럼 관상용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그리스도인. 이러한 자들은 주님 앞에 가서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헌금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봉사했고, 주의 이름으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고 구차한 변명을 해보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를 알지 못하니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관상용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나무의 생명은 열매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나눠주고 그래서 그 열매의 씨앗이 땅에 심겨져 또한 새로운 생명의 열매가 또 맺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그 나무의 존재가 보존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시골에다 과수원을 부업으로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시골에 가 과수원에서 이리저리 뛰놀다 한쪽 구석 땅바닥에 처박혀져 버려 있는 많은 과일더미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 아까운 과일들을 버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왜 이 많은 과일들을 버리는 것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이 이 과일들은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에 버려서 퇴비로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을 눈치 챈 아저씨는 나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 과일들은 제대로 익지 못해서 사람들이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씨들도 실하지 못해서 다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름으로라도 쓰기 위해 버려서 썩힌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먹지도 못하고 또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과일들은 썩혀서 거름으로 밖에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의 생명 또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나눠 주고 그래서 그 성령의 씨앗이 다른 사람들에게 심겨져 그들도 또한 새로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확장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까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내 안의 가지에만 매달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따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먹은 사람들도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렇게 해서 성령의 나무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관상용 교회가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교회, 교회의 외적 치장에만 신경 쓰고 교회의 힘만 자랑하는 교회는 관상용 교회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땅 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사데 교회처럼 교회이름은 있지만 실제로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관상용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내가 섬기는 교회는 관상용 교회입니까? 아니면 열매를 맺는 교회입니까? 자료출처/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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