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만든 일본 최초의 세계문화유산 법륭사
1993년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일본에서는 최초로 등록되는 등,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로서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법륭사.
그 건축양식이 고구려와 백제 양식.
[법륭사 금당과 5층목탑]
한국에 있는 고구려, 백제의 목조건물은 전쟁에 불타는 등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한국은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었고 그래서 고구려, 백제의 건물이 일본 땅에도 남아있게 되었다. 위 법륭사 건물들이 그 대표적 경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일본에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왜곡을 해도 워낙 많은 증거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 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진실은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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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金堂)벽화 -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
금당 제 6호 벽화. 7세기. 법륭사(호류사) 금당.
유명한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金堂)벽화를 일본인이 다시 그린 그림.
실제 그림은 1940년대에 불나서 타버림.
그 전에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 다시 그림.
<실제 담징의 금당벽화>는 위 그림보다도 훨씬 더 깊이 있는 멋이 있었을 것임.
<실제 담징의 금당벽화>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불타 버리고 말았다.
[법륭사 금당]
법륭사의 본존을 안치한 곳이 바로 금당.
담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601년~607년에 세웠다고 하는 법륭사 금당과 5층목탑은 그 자체가 고구려, 백제 양식이고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서는 종이와 먹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볼때 당시 일본의 문명 수준은 저러한 건물들을 세울 수 없었다고 보고 고구려, 백제 기술자들을 초청해서 저 건물들을 지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 백제관음상 -
[백제 금동 관음상]과 [법륭사(호류지) 목조 백제관음상]
같은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병철님 제공
[법륭사 목조 백제관음상]은 일본인들이 예로부터 [백제관음상]이라고 불러서 이름 자체가 [백제관음상]일본인들 스스로가 [백제관음상]이라고 불러 온 불상.
무려 2.8미터의 키 큰 목제 관음상인데 세계인들이 극히 찬탄하는 예술품.
나무로 만들었는데 1천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하다.
법륭사에 전하여지고 있는 백제관음상은 일본국보.
일본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백제관음상은 백제 성왕이 보냈다고 전해진다.
- 구세관음상 -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모습을 본 떠 제작. (역시 일본국보)
키 약 1.8 미터 저명한 동양미술사가인 스페인계 미국인 페놀로사는 1884년 이 관음상이 "조선 미술의 위대한 보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이 불상을 찾아낸 장본인.
이 관음상은 서기 593년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다.
죽은 성왕이 윤회하여 쇼토쿠 태자로 환생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
당시 일본은 백제의 아래나라였기 때문.
관련 기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24620
고대 일본은 고조선(마한)에서 처음 문명이 건너가고 그 이후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계속 문명이 전해지고 그 사람들이 일본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 불상이 전해질 때는 백제계가 강했다.
벼농사, 금속문명도 일본에 가르쳐준 한국 <- 관련글
최재석(일본고대사의 진실 - 1988 )에 의하면 법륭사의 창건주체에 대하여 알 수 있다.
' 법륭사 (호류지)는 670년에 재건된 것으로 그 즈음 671,679,681,685,687,752년에 신라로부터 가사,불상등의 불교용품을 수입하여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재건 호류지의 조성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불교용품은 만들 수 있는데, 절은 세울 수 없다던가 혹은 그 반대인 논리는 있을 수 없다.
불가분 하나의 불교문화를 형성하는 것이고 크게는 같은 범주의 기술인 것이다. (138쪽) '
그리고 그 당시의 일본건축은 맨땅에 기둥을 박는 방식으로 나무가 썩게 되어 20~30년마다 개축을 필요로 하는데 반해 ,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초석입주(礎石立柱) 방식으로 일본에 처음으로 지워진 것이 법흥사-法興寺 (588~596. 백제 위덕왕이 기술자를 보내 짓게 한 절. 지금은 飛鳥寺(아스카데라)라고 불리고 있음)였다.
8세기 중엽 세워진 호류지 동원(東院)이 맨땅에 기둥을 박는 방식이므로 그때까지도 독자적으로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방식>의 가옥은 지을 수 없었다.(143쪽 등)
일본의 불상을 보면 이른바 '아스카'시대까지는 금동불이 존재하고 8세기이후에 해당하는 전반기에는 금동불이 없어지고 목조불시대가 되었다가 다시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와서 금동불의 시대가 된다.
'나라'시대까지의 금동불이 돌연 단절된 것은 금동불의 재료(금속, 밀랍, 안료)를 입수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그 만드는 기법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세기중엽부터 7세기말까지 일본은 시종 한국불상을 얻거나 구매한 점.
7세기까지는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뛰어난 여러 불상이 돌연 8세기 이후에는 단절되어 버린 점.
재일본 고대 금동불 유형은 거의 한국 고대불과 동일 내지 유사한 점.
불상제작의 재료가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은 점.
그리고 당시 일본은 불경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일본 고대 금동불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이라 알 수 있다.
(146~148쪽)
'사카모토 타로'는 저서 '성덕태자' 에서 '최근의 법흥사 터의 발굴결과에 따르면 탑을 둘러싸고 동서북위 3면에 금당이 있고 회랑이 그것을 돌며 ,남으로 중문을 열고 ,북으로 강당을 둔 배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청암리폐사(淸岩里廢寺)에서 볼 수 있는 가람배치와 같은 것으로, 경내에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은 부여출토의 것과 비슷하여 백제도래의 공인이 만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라 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최소한 적어도 백제계 공인이 만들었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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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법륭사 구세관음' 백제 제작 입증 고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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