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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은(銀) 제련기술, 조선이 전했다!

여수룬1 2007. 11. 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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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 -  2007.10.14

 

일본 은 제련기술, 조선이 전했다!

 

 

 

<앵커 멘트>

조선 시대, 이웃 일본은 은을 대량으로 생산했습니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은으로 총과 화약을 사서

조선 침략 전쟁에 나섰는데요.

그런데 은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한 당시 첨단 제련 기술은

다름 아닌 조선이 가르쳐 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대회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동해 쪽 연안에 위치해 예로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빈번했던 시마네현.

2년 전 갑작스럽게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하면서 독도 도발을 일으킨 지방이기도 합니다.

이 시마네현에 이와미 은 광산이란 일본 최대의 광산이 있습니다.

지금은 물론 폐광이 됐지만 일본이 강력한 중앙집권 시대를 연 16세기에 발견돼

유럽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알려진 일본의 은 광산이었습니다.

은을 캐던 갱도는 발견된 것만도 600개가 넘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제작된 아시아와 일본 지도에도 이 지역이 '은 광산 왕국'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와미 은 광산은 지난 7월 일본에서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됐습니다.

이 광산에서 은을 한창 생산하던 17세기에는 일본의 은 생산량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대량의 은을 캐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것은

갱도에서 캐낸 은광석에서 은을 쉽게 추출해 내는 제련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이전 일본에는 이 같은 제련 기술이 없었고 은 생산도 미미했습니다.

일본 역사서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광석 덩어리를 배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 제련을 해 은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1533년 제련 기술이 일본 땅에 전해지면서

일본은 비로소 은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국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유럽의 무역선도 은을 사러 일본을 자주 방문하게 돼

일본이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질 좋은 은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이 기술은

은 광석을 납에 녹인 다음 떠오르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은과 납이 뭉쳐진 덩어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재를 이용해 은을 납에서 분리해 내는 '하이후키법'이란 제련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산에서 은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한

당시로선 첨단 제련 기술을 전해 준 사람이 바로 조선인이었습니다.

이 첨단 기술은 일본 각지의 광산으로 보급돼 일본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인터뷰>나카노(이와미 광산 자료관장) :

"최첨단의 대륙 기술이 그 당시 일본에 전해짐으로써

은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이후키법 제련 기술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정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 8월 10일. "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노와 사사로이 통해

연철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죄가 막중합니다." 라고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 납을 녹여 은을 만드는 것도 간사한 장사치들의 손에서 왜노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 때문에 왜노들이 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 에도시대에 쓰여진 이와미 광산 옛 기록이란 책에도

조선왕조실록과 일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이후키법은 1533년 지금의 후쿠오카인 하카타의 거상 가미야가

조선반도로부터 초청한 경수와 종단이란 기술자에 의해

이와미 은 광산에 최초로 도입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무라이(도쿄대 사학과 교수) :

"(조선이)하이후키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조선왕조실록과 접목해 보면 기술이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경수와 종단이란 두 기술자가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인이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애매한 입장이었으나

일본 학자들은 대부분 두 기술자가 조선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언론들은 이와미 은 광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됐을 때도

이런 사실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가와이(와세다 봉사원 일본어교사) :

"조선 기술자의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가 알기로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와미 은 광산의 유적을 자세히 보면 한반도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광산의 중심부에 있는 이곳은 '도진의 집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도진'(唐人)이란 말은 당시 조선을 일컫는 말로

조선 기술자들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미 광산 옛 기록이란 책에는 '조선 사람이 이곳에 와서 살았으며

주변에는 조선인 집터와 조선 다리라는 이름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스미다(히로시마) : "하이후키법 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 기술이 조선에서 전해졌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하이후키 제련 기술이 조선에서 일본에 전수된 것은 153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0년 전입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의 전수는 전수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조선을 침략하는 발판을 만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도요시는 이와미 은 광산을 막부 직할에 두고

대량 생산된 은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무라이(도쿄대 대학원 교수) :

"처음에 총을 포르투깔인으로부터 구입할 때 은으로 샀습니다.

또 전쟁에 드는 비용도 만만찮은데 은으로 충당했습니다."

 

일본 땅에 최초로 전해져 일본의 경제 사회를 바꾼 첨단 제련 기술은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의 교과서나 매스컴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뷰>강덕상(재일 한인 역사자료관장) :

"일본은 대 한국 내셔널리즘이 있어 한국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지난 1923년 폐광될 때까지 400년 동안 이와미 광산은 양질의 은을 대량 생산해 냄으로써

16세기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활발한 경제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해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된 이와미 은광산,

조선인이 전해준 첨단 기술로 가능했지만

일본이 이 역사적 사실을 언제까지 어물쩍 넘기려 할지 두고 볼일입니다.

 

[국제] 김대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