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마한
만주(滿洲)란 이름은 [만의 땅]이라는 뜻.
[주(洲)]자는 지역을 나타내는 말.
그러므로 만주(滿洲)는 원래는 [만]이라는 땅이었고
이는 [마의(마+ㄴ)] 라는 뜻.
즉 만주는 [마의 땅]이라는 뜻.
(만주의 滿(만)자는 한국어 [만]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한자로 옮긴 것.)
중국고대 역사책에도 한민족은 [3한(三韓)]으로 표현된다.
즉 마한 진한 변한
마한(馬韓)이란 이름은 [스스로를 [마]라고 부르는 한(韓)]을 뜻한다.
마(馬)자 역시 한국어 [마]를 적당한 한자로 옮긴 것.
마한(馬韓)은 마한(摩韓)이라고도 했다. (摩 - 갈 마)
즉 만주도 [마의 땅]이라는 소리고
마한인들 역시 자신들을 [마]라고 불렀다.
후에 이 [마]라는 말은 상감마마, 마님 등으로 전승되어 왔다.
[마의 땅]( 마한과 만주)의 특성은 무엇인가.
고인돌과 빗살무늬토기 등이다.
위 그림은 [고인돌 분포도] 이다.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한국에 있다.
(8천년전 것 - 전남 화순)
세계고고학계에서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로 유명하다.
일본에 있는 고인돌은 약 2천 4백년전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당연히 한국에서 건너간 것.
당시 한국에서 금속문명이 건너갈 때 고인돌 문화도 같이 전해진다.
산동반도의 고인돌 역시 한국에서 전해진 것.
공교롭게도 고인돌의 원조인 마한과 만주는
둘 다 자신들을 [마]라고 불렀던 사람들.
대마도(對馬島)는 부산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맑은날엔 부산에서 맨눈으로 대마도가 보인다.
대마도(對馬島)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한(馬韓)과 마주 대하고 있는 섬]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산 역시 원래는 마한의 영역이었던 것.
경상도 분들이 말끝마다 ' 마...그래서 마...그런데 마...' 하고
말끝마다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도^^
한국의 현대고고학은 일제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한국고고학계의 비극.
일제는 그들이 발굴한 한국의 고대유물들을 많은부분 왜곡,날조,파괴했다.
특히 마한의 유물에 대해서 그런 짓이 특히 심했다.
일본의 금속문명, 쌀농사는 2천4백년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는데
이는 한국보다 최소한 수천년 늦은 것이고
일본의 최초 금속문명, 쌀농사는 고인돌문화를 가지고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하여 규슈(구주)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일제의 자존심에 심각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그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마한의 존재를
심각하게 왜곡 축소하게 된다.
마치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원전에는 별다른 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왜곡하는 것이 일제의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누가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었는지를 모호하게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마한의 유물은 대부분 파괴되던지
백제,신라,가야의 유물로 둔갑되었다.
일제는 마한의 존재 자체를 극히 훼손, 축소하고
일본을 건국한 세력이 백제,신라,가야처럼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 이라는 학설을 주장하면서
일본을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급으로 만들고
나아가 그보다 더 앞서 국가다운국가를 세웠다는 날조를 자행한 것.
이는 일제 식민지배의 정당성 주장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목숨걸고
획책해야했던 '눈가리고 아웅하기' 식의 날조.
그리하여 마한의 존재는 보잘것 없이 왜곡,축소되고
일제의 뒤를 이은 소위 식민사학자들도 그런 일제의 주장을 답습한다.
이것이 한국고고학계의 최대 비극중 하나.
만주는 진한의 터전이었다.
고조선이 문을 닫은 후 진한에서는 부여,고구려,백제 등이 생기는데
백제가 남하를 시작한다.
[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에 낙랑(최씨낙랑국)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는 청천강 유역 정도에 있었다.
( 말갈(맑알)은 여기저기 퍼져있었던 것으로 추정.)
왕이 청천강 지역에서 하루만에 왔다 갔다는 것으로 보아 (어제 순행)
위에 나오는 한수(漢水)란 한강이 아니라 대동강.
고대에 한민족에게 한수(漢水)라 불린 강은 3개.
1. 한강
2. 대동강
3. 압록강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 <- 관련글
백제가 서기 475년까지 왕성으로 사용했다는 하남위례성은
한강 이남이 아니라 [대동강 남쪽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한강이남에서 아무리 하남위례성을 찾아보았자 못찾은 이유가
원래 없는거라 못찾은 것.
풍납토성, 몽촌토성도 시대적으로 보아도 원래 마한의 성이고(서기전 1세기)
나중에는 백제가 사용했겠지만
왕성으로 사용한 결정적 증거는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대동강지역은 마한의 입장에서는 변방이었기 때문에
초기백제가 쉽게 그곳으로 수도를 옮길 수 있었겠지만
마한이 별다른 반발없이 그 지역을 내준것은
마한과 진한이 함께 고조선연방 즉 같은 나라였고
그래서 진한의 후예국 중 하나인 백제에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동부와 만주서부에서 변한, 진한인들이 건너올때에도
마한은 흔쾌히 땅을 떼어준다.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노인들이 세대를 넘어 전하기를
'옛날 진역(秦役 : 만리장성 만들기에 동원?)을 피해 망명(亡命)하여
자연스레 차츰 한국(韓國)에 왔다.' 한다.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내 주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출처-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辰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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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에서 보이듯이 백제의 남하 이전인
서기전 2백년경 진한(변한)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올때도
마한은 순순히 땅을 나눠 주었다.
[세형동검 (細形銅劍)]
위 세형동검은 마한 고유의 칼인데 (청천강 이남에서 주로 발견)
당대 최고 수준의 검이다.
이런 정도의 검을 사용하던 마한인들이
진한(변한)땅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유독 그렇게 관대했다는 것은
마한 진한 변한이 원래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 마한 진한 변한이 고조선연방을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또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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