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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여수룬1 2007. 8. 20. 22:36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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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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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아시겠지만
한사군은 요서와 북경지역 즉 변한(변조선)지역에 있었다.
변한은 나중에 기자조선 , 위만조선이 된 지역인데
그 지역에 있던 것이 한사군.
 
 낙랑.임둔.현도.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관련기사 - [연합뉴스 2002-04-11 ]

1.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보면 낙랑군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갈석산은 요서의 산해관 옆에 있다.(만리장성의 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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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낙랑군은 저기.

 

2. 임둔군 태수가 중국황제로부터 받은 봉니가 만주서부에서 발견됨.

봉니(封泥)란 상자를 끈으로 묶고 그 끈 매듭위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찍은 도장을 말한다.

즉 말하자면 " 임둔태수 이외에는 열어보지 말라." 하는 경고.

이 봉니가 위 그림의 저 곳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낙랑군 갈석산(樂浪郡 碣石山)

[조선일보 2006-11-07 ]    

 

어떤 지역을 답사했을 때 그 감흥이 오래가는 지역이 있다.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갈석산(碣石山)이 그런 곳이었다.

일반에게는 생소하지만 갈석산은 고조선의 강역 비정에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북한 지역을 중국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고조선 수도에 한(漢)나라의 식민 통치기관인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는데,

그 자리가 현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도 고구려가 평양에 있던 낙랑군을 몰아낸 후

남쪽으로 진출했다는 식으로 ‘낙랑군=평양’을 전제로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평양’ 설(說)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인데,

해방 후에 이병도(李丙燾) 교수가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1972)’ 같은 책에서

계속 이를 지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정설(定說)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사료를 살펴보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이병도 교수는 ‘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에 비정했다.

이는 수성과 수안의 ‘수(遂)’ 자가 같다는 지극히 소박한 이유에서였지만

현재도 어떤 학자들은 이 학설을 무작정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나라 정사인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는 갈석산이 버티고 있어,

평양이 아니라 이 지역이 낙랑군 지역이었음을 몸으로 증거한다.

진시황과 조조를 비롯해 9명의 황제가 올라서 유명한 갈석산에 한번 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의 영역이라는 동북공정의 논리는 이 갈석산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이덕일 ·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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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강역]

 

갈석산(碣石山)은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산해관 부근에 있다.

 

즉 한사군 중 하나라는 낙랑군(樂浪郡)은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는 것.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산해관(山海關)의 비밀    <- 참고글

 

 

그러므로 ‘사기(史記)’ 에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의

그 갈석산이 산해관 옆에 있는 지금의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갈석산(碣石山)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즉 낙랑군등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한민족의 기를 꺽고자 한 일제의 사기일 뿐

한사군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

즉 한사군은 고조선의 변방인 위만조선지역만 해당하는 것. 

 

아래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논문에 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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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6-02-27 ]    


고대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허베이(河北) 성 동쪽에서 랴오허(遼河)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위 얘기는 한사군이 대강 산해관부터 중국쪽으로 줄줄이 있었다는 것.) 

김종서(51·중앙대 강사) 씨는 최근 중앙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서 문헌 고증과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통해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대륙 깊숙한 곳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논문에서 적용한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거리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 그 위치를 역추적하는 방법.

중국 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洛陽·허난 성 서쪽의 도시)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서(漢書)’의 무릉서(茂陵書)에는 장안(뤄양보다 더 서쪽에 있는 현재의 시안·西安)에서

6138리에 임둔군이, 7640리에 진번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 1리가 얼마인가에는 논란이 있다.

김 씨는 위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뤄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대의 기록과 현재 지도상의 거리 비교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평양지역으로 추정돼 온 낙랑군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랴오닝 성 서부 진저우(錦州)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현도군은 허베이 성 동쪽과 랴오닝 성 서부를,

황해도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장됐던) 진번군은 압록강 서북쪽을 넘어설 수 없다.

김 씨는 여기에 한대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멀었던 현도군은 현재 베이징(北京) 동북쪽 지역,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진번군은 랴오닝 성 서부 다링허(大凌河) 유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랴오닝 성 진저우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직인이 찍힌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또 흥륭와, 홍산, 하가점 등 랴오허강 유역의 고대 신석기·청동기 문명과 고조선의 연관관계를 뒷받침하게 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중국 요서에서 출토된 '임둔(臨屯)' 봉니

 

봉니(封泥) -
다른 곳에 보내는 문건을 넣은 나무함을 도중에 열어보지 못하도록
노끈 같은 것으로 가로세로 매여가지고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군현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
일종의 "발송관"

 

 

아래 지도는 낙랑군의 위치

 

 


 

 

지도출처 - 우리 역사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