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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계 최초의 과학적 난방형 온실

여수룬1 2007. 1. 26. 11:49
 조선시대, 세계 최초의 과학적 난방형 온실(인용)
조선시대, 세계 최초의 과학적 난방형 온실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재배할 수 있었다

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 복원된 온실의 모습.  ⓒ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비춰진 서양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눈과 머리카락은 알록달록하고, 피부는 우유같이 희며, 코는 하늘을 찌를 듯하고, 눈은 움푹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니. 어디에서나 미군들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또 우스웠던 것은 미군들의 똥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똥은 시원하게 크고 굵은데 미군들의 똥은 얇고 작기 그지없었던 것. 사람들은 ‘몸집도 큰 서양 코쟁이들이 똥은 쪼잔하게 눈다’고들 수군거렸다.

지금 우리는 왜 서양인과 한국인의 똥이 다른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서양인들의 주식은 고기이다.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고기는 장을 거치며 대부분 소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채소를 섭취했다. 채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포벽, 셀룰로오스는 인간의 장에서 소화하지 못하여 대부분이 그대로 방출된다. 한국인들의 똥이 굵고 큰 이유는 바로 채소 위주의 식습관 때문이었다.

채소를 좋아했던 똥 굵은(?) 한국인들. 그런데 걱정이 생긴다.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겨울에 조상들은 어떻게 채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언뜻 생각나는 것이 바로 김치이다. 김치는 채소를 소금에 절여 오랜 기간 동안 저장할 수 있도록 한 음식이다. 그러나 김치는 어디까지나 절인 채소일 뿐이다. 아무런 손질을 가하지 않은 싱싱한 채소를 겨울에도 맛볼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었단 말인가?

놀랍게도 답은 ‘있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하는 독자들을 위한 수수께끼 하나. 겨울에 채소를 재배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이용할까? 그렇다. 온실이다. 겨울에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저온의 환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실을 지어 인위적으로 햇빛의 양과 온도를 조절해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조상들도 겨울에 채소를 기르기 위하여 온실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오호라! 옛날에도 온실이 있었다니! 참 신기할 노릇이다. 그렇다면 조상들의 온실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옛 온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온실에 대한 언급은 조선 세종 때 의관이었던 전순의가 지은 농서, <산가요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전순의는 채소를 기르는 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당시 전해오던 여러 가지 농서를 읽었다. 당시 농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고려 말의 <농상집요>. 그러나 <농상집요>는 아쉽게도 그가 원하는 채소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전순의는 자신만의 농서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의관이었던 전순의가 식품학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그는 기존 농서들을 연구하여 그 당시 재배되고 있던 갖가지 채소를 조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관찰하거나 고안한 사실들을 덧붙여 <산가요록>을 썼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채소들은 모두 오이, 동아, 박, 수박, 토란, 아욱, 가지. 순무, 무, 갓, 생강, 마늘, 파, 염교, 부추, 버섯, 군달(근대), 상추, 미나리 등으로 오늘날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각 채소의 특징과 재배상의 주의점이 이 책 속에 가득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전순의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채소는 봄, 여름, 그리고 가을에만 자란다는 사실이었다. 채소는 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겨울에는 이러한 채소를 재배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온도가 중요한 관건인데... 전순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최초의 온실에 대한 밑그림이 구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희소식이 들려왔다. 당시는 15세기 초였다. 이 시기에 비로소 경상도에 온돌이 보급된 것이다. 그래! 온돌을 이용하는 거야! 온돌을 깐 집에 채소를 기르는 거지!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채소를 기르는 집의 모습이 종이 위에 그려진다. 이것이 과학적 난방식 온실의 시작이다. 전순의는 온실에 채소를 재배하는 이 새로운 농법을 가리켜 ‘동절양채’ 법이라 불렀다.

실제 전순의의 온실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온돌을 짓고 온돌 위에 약 45센티미터 높이의 흙을 쌓는다. 이때 아궁이에서 만들어진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인위적으로 땅을 덥히는 이러한 방법을 ‘지중가온’이라고 했다.

이 온실에는 황토로 삼면에 벽을 둘렀다. 때문에 온실 속에는 통풍이 잘 이루어졌다. 나머지 한 면에는 벽 대신 햇빛이 들 수 있도록 큰 창(살창)을 달았다. 그리고 이 창에는 기름칠을 한 한지를 붙였다. 기름칠은 한지를 투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밖에서 온 햇빛이 창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추운 날에는 살창 위에 두꺼운 거적(날개)을 덮어 온실 안의 온도를 유지하도록 했다. 한지를 통해 습기가 잘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장점이었다.


▲ 전순의의 <산가요록>(2001년 10월 발견).  ⓒ  

그가 고안한 온실의 또 다른 특이점은 능동적으로 습도를 맞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겨울철 난방을 한 방에 장시간 앉아 있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방의 온도가 높아지면 습도가 낮아져 금방 코와 입이 건조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돌을 땐 온실의 공기도 쉽게 건조해졌다. 그러나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 적절한 습기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전순의는 온실 속에서 물을 끓였다. 물을 끓이면서 나오는 수증기가 온실 속으로 직접 투입된다면 방안의 습도는 자연히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는 공중가온법이라고 불렀다.

물론 전순의의 온실은 실제로 민간까지는 보급되지 않았다. 기름을 칠한 한지도 그렇고, 온돌을 덥힐 난방용 땔감도 여염집에서 부담하기에는 매우 버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기른 꽃과 채소는 주로 왕실에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맛보고 아름다운 꽃향기를 맡았던 것이다! 아마도 겨울철, 왕의 똥은 일반인의 똥보다 훨씬 굵지 않았을까?

이러한 전순의의 온실은 계명문화대학 김용원 교수에 의해 최초로 복원되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복원된 온실을 짓고 무, 상추, 시금치 등의 채소를 심었다. 그리고 온실의 위치별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였다. 이 결과 온돌 위 지중 온도는 20도 이상의 지속적인 보온 효과가 있었고 실내 온도는 10도 이상이었으며 온실 내 습도도 수증기를 유입시켰을 때 온실 내부가 온실 밖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온실에 심은 채소도 무리 없이 잘 자랐다. 전순의의 온실이 꽤 정교했음이 복원된 온실에 의해 증명된 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순의의 온실이 세계 최초의 능동적인 난방형 온실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최초의 온실은 1619년의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든 난로를 이용한 온실이었다. Green house라는 현재의 이름은 영국에서 J. Enelyn이 1691년 데운 공기를 실내로 유입하는 온풍 난방법을 발명한 이후에야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온실은 조선 초 145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온실보다 약 140여 년 가량이나 앞섰을 뿐 아니라 훨씬 능동적이고 과학적인 온실이었다. 첨성대와 측우기에 비길 바 없는 참 자랑스러운 우리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채소를 사랑했던 한 의관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멋진 우리 과학. 아마 온실의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은은한 겨울철 햇빛이 기름을 바른 창을 통해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아래에는 싱싱한 채소들이 어여쁜 초록을 뽐내고...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도 들리는 듯. 온실 안을 채우는 것은 싱그러움이다.

그 싱그러움 속에서 똥 굵은 우리 과학은 무럭무럭 자라왔다. 이제 우리는 조상들이 가꾼 열매를 수확하려 한다.

사진출처: http://anthronet.org / 오마이뉴스 곽교신(2005.1.20)
참고문헌: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한국농업사학회
동아시아 농업의 전통과 변화/한국농업사학회
조선시대 농법 발달 연구/염정섭
(농부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농업박물관/김순철


/글 꿈꾸는 과학 이솔희  sll3ll@hanmail.net